유엔군의 북진 속도는 이전 북한군의 남진 속도와 맞먹었다.
19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북 5도 도지사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통치권은 나에게 있으니 당장 취소하시오!" 라고 하였다
10월 23일, 북한군 사령부는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전세가 불리하니 정면 대결은 피하고 숨어서 게릴라전을 펴라!"
11월 중순경, 북한 지역의 대부분이 유엔군의 손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공격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국경 폭격이 끝나자 맥아더는 총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1월 25일, 중공군이 북한군과 합세해 대반격에 나서자 유엔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11월 3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충격적인 발표를 하였다.
트루먼: 한국전쟁에서의 원자 폭탄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소!"
다른 사람: 맥아더 사령관도 같은 생각인감요?
트루먼: 나보다 더 적극적이오
이에 전 세계가 미국을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반전 반핵!!, 살인마 트루먼!, 미국은 지구를 떠나라!, 맥아더도 마찬가지! "
결국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 계획은 없던일로 하겠소!"
그 무렵 전의를 상실한 유엔군은 남으로 후퇴하고 있었고,
중공군 약 20만, 북한군 약 16만 합하면 36만 유엔군은 약 42만 이렇게 됬는데도 진 이유는
매복, 기습, 포위 등등의 뛰어난 전술을 하고 있고 게다가 북한 유격대와 인민들의 열렬한 협조가 있다.
어떤 협조나면 식량 조달, 장비 운반, 정보 제공, 길 안내 등이었다.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넜다.
유엔군은 계속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또다시 빼앗기고, 37.5도선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것을 '1 . 4후퇴'라고한다
그리고 그 다음 맥아더는 잘렸다. 맥아더는 미국행 비행기를 올랐다.
맥아더 후임으로 사령관이 된 리지웨이는 반격 작전을 짯다.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이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에 들어갔다.
1951년 2월 10일, 11일 이틀 동안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있던 육군 제11사단 3대대 병력은 그 지역 주민 719
명을 공비로 몰아 박산 골짜기에서 학살하였다. 이것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이라고 하고 그중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이나 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3월 18일 서울을 다시 찾고 3월 말에는 38선 이남(정확히 지금의 휴전선 이남)을 다시 점령했
다. 그후 사소한 공방전만 이따금 거듭될 뿐 전선은 별 변화 없이 그 상태로 굳어져 갔다.
미국은 전쟁의 확대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적어도 10만 이상이 희생돼야 북한을 재점령 할 수 있을텐데 이걸 어쩐다?" 라고 했다
그해 7월 10일, 개성에서 최초의 휴전 회담이 열렸다.
5월 6일, 경남 거제도에 있는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도드 미군 준장이 인질로 잡혔다.
거제도 포용수용소: 6.25 전쟁 당시 13만 2천 명 정도의 북한군과 중공군을 수용했던, 남한에서 가장 큰 포로수용
소이다. 도드에 이어 신임 수용소장 콜슨이 협상에 나섰다.
그 북한 포로들의 요구 조건은 이렇다.
잔학 행위 중지
자유 송환 취소
강제 심사 금지 였다.
콜슨은 송환 문제만 빼고 다들어줬다. 북한군도 찬성했다. 그리고 도드가 풀려났다.
콜슨은 공식적으로 잘렸고 비공식적으로는 임무가 끝나 돌아가였다.
콜슨은 도드보고 복수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곧바로 포로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공상군 포로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었다.
6월 3일부터 3일 동안 총 1,300여 대의 미 공군 폭격기들이 북한의 수력 발전소를 폭격했다.
미 공군은 계속해서 북한의 주요 도시와 시설에 수많은 폭탄을 퍼부어 거의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미 공군의 대규모 공습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8월 29일 단 하루의 공습으로 평양 시민 5만중 7천이 사망했다.
원산시를 처참하게 파괴한 이유는 10월 25일에 있을 상륙 작전을 위해서였다.
8월 5일에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으로 뽑혔다.
11월, 아이젠하워(1890~1969)가 제 3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대통령은 핵무기를 쓰면 쉽다고 하였다
1953년 4월 12일 이승만은, "끝내 휴전이면 과인은 국군의 단독 북진을 명령 하겠다!" 라고 하였다.
회담 중단 199일 만인 4월 26일, 회담이 다시 열렸다. 회담에서는 아이젠하워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5월 중순 미 공군이 북한의 농업용 저수지들을 공습하였다.
6월 8일, 북한군이 판문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전쟁 포로 교환 문제가 해결되었다.그러자 이승만은 몰래 군과 경찰을 불러,
"오늘 18일 밤, 포로를 무진장 탈주시키시오!" 라고 하였다.
6월 18일 밤 군과 경찰은 2만 7천여 명의 포로를 탈주시켰다. 이것을 '반공 포로 석방' 이라고한다.
그리고 맥아더는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채결된다고 하였다.
이승만 어떻게 방해를 하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그래! 반대 시위! 학생들을 동원해 결사 반대 시위를 하는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날마다 거리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것을 '휴전 반대 시위' 라고 한다
사진을 보면 영문으로 쓴 구호는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뜻이다.
다음이 마지막이네요 별평가도 주시구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2010.07.09
201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