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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을잃게만드는사건
2011.01.30 00:36 조회 : 58
Lv. 1 MC아이유 strWAview:48| 작성자 게시물 더보기
우키시마호사건 [浮島號事件(부도호사건)]
요약
1945년 8월,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한국인 노동자와 일부 가족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을 향하던 중 폭발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언제 1945년 8월 24일
어디서 일본 교토시 인근 마이즈루항 근해
본문

일제는 패전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하여 한국인 노동자를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일본 해군을 통해 예하부대에 내렸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강제 징용되었던 7,000여 명의 한국인을 태운 4,740t급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호는 8월 21일,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의 오미나토항[]을 떠났다. 그러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24일,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갑자기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고의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만내()에 부설한 미군의 기뢰와 충돌해 우연히 침몰했다는 일본측의 주장과, 함께 탄 일본 해군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있을지도 모를 보복이 두려워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자폭설 등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지만, 현재로서는 자폭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당국은 배가 방향을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정선() 명령에 따른 것이며, 배가 침몰한 것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 때문이라고 지금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또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 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사망자만도 1,000명이 넘으며, 배에 탔던 한국인도 생존자의 말을 빌리면 7,0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총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 배에 승선하였고, 최소한 5,000명이 사망하였다는 자료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홋카이도[]·아오모리현 등 일본 도호쿠[]지방으로 끌려가 일제의 강제 노역으로 노예처럼 연명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서,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즐거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사건 후 이들을 위한 추도회가 계속 열려왔으며, 1994년에도 이른바 '우키시마호사건'의 추도회가 도쿄[]에 있는 사찰 유텐사[]에서 열렸다. 특히 이때는 대전 후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B·C급 전범으로 구속되었던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들도 참석, 일본의 전후 보상문제를 추궁하기도 하였다.

1995년 7월 28일, 도쿄에서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아시안 블루-우키시마호 사건》이라는 영화 시사회를 가졌으며, 그 해 8월 개봉,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잔학상의 한 단면을 고발하였다. 또 1999년에는 북한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을 제작하였고, 2001년 8월 23일에는 교토[] 지방법원이 이 사건과 관련된 한국인 생존자 15명에게 일본 정부가 300만엔씩 총 4500만엔을 배상하라는 국가배상명령 판결을 내림으로써 처음으로 원고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소송에서 '당시 국가가 징용자에 대한 수송책임이 없었으며, 폭침은 미국이 부설한 기뢰로 인한 것으로 불가항력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아직까지도 진상 조사나 공식 사과는커녕 관련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는 등 어처구니 없는 책임 회피 행각을 계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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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
  • 수고하십니다 Lv. 1o칠흑의콤보o 2011.01.30
  • 준장 ㅊㅋ Lv. 1중국토종버섯 201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