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때까지 전쟁 양상이 궁시와 창검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왜나라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포르투칼의 조총을 대량으로 수입해다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야 조선으로 침략하니, 그 조총의 위력은
당시의 칼전이 주류된 전쟁맵에서 실로 혁명적인 위력을 발휘 하얐던 것이다.
이에 관군들은 칼적중 1죽임 하나 올리지 못하고 비루하게 죽어 나갔으며. 양민들은 총소리만 들려도
뒤를 돌아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계급이 높은 자들은 전란중에 수장된 자로써 군사들을 지휘하지 않고
성에서 강제종료로 도망쳐대니, 무릇 조선의 존망이 풍진속의 촛불이라 위태롭기 이루 말할데 없었다.
마침내 영남까지 왜적들의 기세가 미칠쯤, 진주목사 이경은 진주성을 버리고 줄행랑치고 마는데
그 수하에 간부들 또한 모두 풍비박산하여 목숨 하나만 구하고자 달아나려 하자, 홀현히 어디선가
"도망하거나 군심을 이완케 하는 행돌을 하는 자는 이 총에 머리가 날아갈것이라!"
라고 누군가 꾸짖으며 손에 길다란 총통을 들고 나타나는데
바로 진주통판 김관총(金貫銃) 이었다.
그는 상관인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군을 지휘하니, 비로소 병졸들은 물샐틈
없는 단결로 왜적의 침략을 막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결전을 기다리는데.
김관총은 일찍이 조총을 모방하여 그와 같은 총통 100개를 만들어놓더니 마침내 유능한 장정들을 시험
으로 가려뽑고 훈련 시켜 부대를 창기(創起)하니 그 이름이 '저격대(狙擊隊)'라.
이들은 200보 밖에서도 쉽게 적을 머리명중 시키니, 과연 군졸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임진년 10월 5일
마침내 등원랑(藤元郞)의 대군이 진주성에 도착하여 포위 하기에 이르니. 왜군 3만에 진주성의 병력은
겨우 3천 8백여명 밖에 되지 아니 하얐다. 그러나 김관총 장군은 침착하게 맵을 살핀 뒤 성문을 굳게 닫
고 저격대에게 입구를 총으로 조(眺)고 있을 것을 명하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방어전을 준비하니
"경겁하지도 말며 경동하지도 말아라. 무리한 공격은 수비를 그르친다" 명하였다.
드디어 북소리가 울리며 천지가 떠나갈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왜군들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왜군의 기마대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기세를 올렸고, 총포부대의 총알은 빗발처럼 성안에 쏟아졌다.
도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성벽을 육박으로 기어오르자 기다리던 수비병졸들이 끊는 기름물과 큰 돌
을 굴리며 활을 쏘아 맞추었다. 화포가 괴음을 지르며 성 밖의 비루를 터트리고 장군 스스로 저격대와
함께 총통으로 성문을 뚫으려는 왜군들 머리를 꽤어 맞추었지만 왜적의 수는 줄어들줄 몰랐다.
성벽이 사방으로 달라붙은 왜적들로 검어졌고 우리 병사들이 힘이 부칠쯤 장군이
"이 성 안에서 죽으나, 도망가 밖에서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 우리 함께 죽되 비록 떳떳하게 죽어 보
이리!" 하며 준비한 성내 연주가들이 나와 삼현육각을 잡고 풍류를 울리니, 곡조가 참으로 웅장하고 비
장하여 모든 장졸과 민병들이 죽기로 성을 지키기를 맹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수세의 부족으로 성문이 뚫려 왜군들이 물밀듯이 성 안으로 밀려들자 전령이 이를
김관총 장군에게 전하는데, 장군이 필사의 결연으로 수하장수 부사수(夫射手)에게 준비된 명을 내리니
"사나운망루(闇摯四十二)를 꺼내오라" 하얐다.
부사수가 무기고에서 커다란 총통과 총알 마흔두발에 1홉 상자씩 수십상자를 대령하니 부사수와 함께
성문으로 달려나가 적들을 조준하였다.
이에 장군을 호위하던 저격대가 "장군, 왜놈들이 너무 가까이 있으니 물러나셔야 하옵니다"하고 아뢰니
김관총 장군이 " 오게 두어라 " 하고 일언 하자마자 총통의 방아쇠를 당겨올리니 찢어듯한 소음과 함께
총탄이 연발하여 왜병들을 뚫어 맞추는지라, 우수수 쓰러지는 왜군에 우리군 적군 모두 놀라더라.
이에 경악한 등원랑이 총포부대를 찾아 성 안으로 진격시켜 장군의 머리를 노리는지라 저격대가
신기력전(神技力戰)으로 장군을 엄호하여 적을 막았다.
이윽고 왜병들이 장군의 신묘한 무기에 짚단 갈아엎히듯 떼거리로 맥없이 쓰러지는 와중에 모든 왜군들
이 장군에게로 향하는 바, 진주성의 모든 병졸들과 백성들이 충심으로 전력을 다해 적들을 막아세우니,
계급 없는 양민도 전적이 10죽임 0죽음이요 죽임률이 100할이라. 관병들의 창칼은 피로 녹들고 민병들
은 호미와 낫으로 적들의 피뿌리고, 무기 없는자는 이로 적의 목을 물어뜯으며 아녀자들은 깃발을 흔들
며 돌팔매질하니
그야말로 결사항전(決死抗戰)은 이런 경우에 가히 쓸만하랴 필사(必死)라 반드시 죽임을 각오함이 아니
라 기여코 죽고자 달려들었으니 그날의 진주성은 아군적군의 피로 흥건히 붉었으리라.
마침내.
날이 저물어오자 왜군들은 후퇴하여 철군하였다.
관병과 백성들이 승리에 함성을 지르며 깃발을 바로 꼽고 주위를 둘러보니
죽은 관민들과 왜병의 수효가 이루말할 수 없이 많더라.
수하 장수들이 장군에게 왜적의 퇴각을 알리기 위해 찾아간 바, 저격대가 주위를 뚤러싼채
죽어있고 그 가운데 장군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지라, 황급히 시체들을 해치고 장군을 뫼시니
적의 유탄이 장군의 몸을 범하였더라.
진주수성(晉州守城)의 승전보가 선조에게 들어가자 선조는 심히 기뻐하며 장군의 승리를 격려하며 경상
우병사의 직첩을 내렸으니나, 어명이 진주성에 당도할때쯔음 장군은 그만 병상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
았다. 이 같은 비보에 각지의 백성들과 군병들이 참담하게 슬퍼했으니, 환난에 백성들을 지켜주던 영웅
이 이리도 일찍 떠났으니, 이제 주인 잃은 진주성의 군민들이 어떤 화를 입을지 알수 없겠다.
장군이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언하기를 "나의 무기들과 도안은 모두 불살라 태우라" 하니, 과연 그 후
가등청정이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함락 시키고 장군의 무기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임란삼대첩(壬亂三大捷)]의 하나인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으로
김관총 장군이 사용한 '암지사십이(闇摯四十二)'는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장군의 이름에서 가져온 '기관총(機關銃)'이
란 이름으로 기록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