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식 경기관총
《 3년식 중기관총. 6.5mm×50탄을 사용하는 기관총이었으나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사거리가 충분치 않아 일본군은 이 기관총의 후속모델로 92식을 채용한다 》
조준기도 3년식에서 사용하던 소총을 방불케하는 산형조준기였던 것을 개량해 상하 좌우에 조정이 가능한 환가늠구에 맞게 바꿨으나 별도로 92식 스코프( 광학 조준기 )도 장착할 수 있었다( 후에 프리즘식의 93식 및 94식 스코프나 96식 스코프도 장착 가능해진다 )
사용되는 탄환은 7.7mm 92식 탄인데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제식 소총인 99식 소총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총은 쇼와 16년인 1941년부터 일본 육군의 주력 중기관총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쌓아 올리고 있었지만 분당 250발의 늦은 발사 속도로 인해 미군 병사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의 되기도 했으나 일본군으로서는 한 정의 총이 아쉬운 판이라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운용했다.( 이유가 당혹스러운데 늦은 발사속도로 인해 안그래도 부족한 탄환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며 묵직한 무게로 인한 저반동과 삼각대에 거치해 사격하는만큼 높은 명중률이 발휘된다는 점이 그 이유다. 하지만 소총에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탄을 사용함으로서 안그래도 복잡한 일본의 탄약 보급체계에 찬물을 끼엊는 것은 조금 그런 것이 아닐까? )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한국전쟁 초기 국군에 의해 일부가 쓰인 바 있는 이 기관총이 최후로 쓰인 것은 1960년대 중반 영국령이 홍콩에 92식 중기관총에서 발사된 7.7mm×58R탄이 날아들었던 일인데 아마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을 인민해방군이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일본인들은 이것을 두고 '20년 이상 지난 총이 멀쩡히 작동되는 것이야말로 일본 공업 기술의 경지다'라고 자부하고 있다고 한다.
99식 경기관총
《 미군에 노획된 99식 경기관총. 개머리판에 일장기를 부착해 놓은 것이 노획총기임을 알려준다 》
《 착검한 99식 경기관총. 착검 시 명중률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이는 종전 후 테스트에서 나온 결과이며 실제로는 보병과 같이 돌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 99식이 등장하기 전 6.5mm×50탄을 사용하던 시절의 주력 경기관총인 96식 경기관총. 11년식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나 여전히 위력 부족 및 탄피에 기름칠을 해줘야하는 것은 똑같았다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기존의 6.5mm×50탄의 위력부족을 체감한( 특히 중일전쟁을 겪으며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 일본육군은 신형 7.7mm×58탄을 개발하고 이 탄을 사용하는 99식 소총과 92식 중기관총( 사용탄은 별도의 92식 )을 채용하면서 한편으로 분대급에 배치될 새로운 경기관총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당시 일본군 편제에는 1개 분대에 경기관총 1정이었기 때문에( 동맹국 독일이 MG 34/42 2정을 배치하고 있던 것과 대조된다. 여하튼 다용도 기관총과 그것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의 차이인 것일지도 ) 일본군으로서는 우수한 경기관총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삼각대까지 합치면 무게가 55.5kg이나 나가는 92식 중기관총을 지원화기로 하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고( 그것도 생산량이 부족해 모든 부대에 배치되지도 못했기에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국민당군이 사용하던 체코제 ZB-26까지 노획해 써야했다 ) 일본군이 경기관총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당시 일본군이 운용하던 6.5mm 11년식 경기관총은 문자 그대로 실패작 그 자체였고 이 총의 기괴한 급탄기구를 탄창식으로 교체하여 신뢰성을 향상시키고 총열도 운반손잡이를 부착한 신속교환식으로 나름대로 현대적으로 개량한 96식 경기관총 역시 탄피의 원활한 배출을 위해 하나하나 기름칠을 해줘야하는 등 손이 많이가는 골칫거리였다.
《 11년식 경기관총. 기괴한 급탄기구를 채용해 탄피 배출이 원활하게 하려면 탄피에 하나하나 기름칠을 해줘야하는 기관총으로 결국 탄창 장전식의 96식으료 교체되고 만다 》
결국 일본 육군은 오구라 병기창에 이 두 경기관총의 후계 기관총으로 7.7mm×58탄을 사용하는 경기관총 개발 지시( 기간은 쇼와 13년에 개발을 시작 16년에 채용이 가능할 것 )를 내리게 되어 오구라 병기창은 가칭 1식 경기관총으로 불리게 되는 신형 경기관총을 개발했지만 이 총은 실패로 끝났고 이듬해인 쇼와 14년( 1939년 ) 츄오 공업에서 96식의 7.7mm 형을 제시해 마침내 이 기관총이 99식 경기관총으로 채용되었다.
99식 경기관총은 99식 소총과 함께 일본군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으나 일본군의 만성적인 무기와 탄약부족으로 인해 6.5mm 38식 소총과 96식 경기관총까지 혼재되어 보급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일본 본토에서 보충되는 신병이 전선의 고참병들보다 더 신형 장비를 채용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나올 지경인가?
99식의 총 생산정수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월 1,200정 정도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 총은 96식 경기관총을 기초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96식을 사용했던 기관총 사수들이 어렵지 않게 익숙해진다는 점과 필요시 99식 소총의 클립도 장전할 수 있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역시 99식 소총에 사용하지 못했던 92식 중기관총용의 92식탄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99식 경기관총은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일본군의 주력 경기관총으로 운용되었으며 여러 에피소드를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착검 기능이다. 엥? 기관총에까지 착검을 한다고? 요즘 기준으로보면 아주 웃기는 일일 것이다. 군대 내에서 가혹행위 중 하나였던( 요즘 이렇게 시켰다가는 영창이 아니라 구속일 수도 있겠지만 ) 'M60 기관총으로 총검술 시키기'를 방불케하는데 이러한 발상이 실제 일본군에 의해 실용화되었던 것이다. 99식 경기관총의 길이가 119cm이니 여기에 30년식 대검이라도 단다면 백병전에 도움( ? )이라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전에 미군의 탄막에 희생될 가능성이 더 크다 )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있는데 전후 일본군 기관총 시험 테스트에서 99식 경기관총에 착검 후 사격한 결과 명중률이 좀더 높았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를 두고 "착검 기능은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결과론일 뿐, 실제로는 돌격 시 보병과 함께 행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뭐 북한군은 73년식 대대 기관총에 총류탄 발사 기능까지 추가해놨으니 이 정도는 약과려나?
《 제원 》
99식 경기관총의 제원은 일본측 기록을 기준으로 함( 유효 사거리 2,000m라.. )
길이 : 119cm
총열길이 : 48.3cm
중량 : 11.4kg
구경 : 7.7mm
사용 탄환 : 7.7mm×58
장탄수 : 30발( 탄창식 )
최대 사정거리 : 2,700m
유효 사정거리 : 2,000m
발사속도 : 550발/분
탄속 : 715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