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내게 해준게 뭐가 있다고 1년에 몇 시간씩 어릴 땐 예비군으로, 좀 나이먹었더니 민방위로 불러대는데 그게 참 그렇거든요. 생업에 지장도 주고, 내가 낸 세금이나 축내는 것 같고... 가 봐야 뻔한 비디오나 틀어주는거 빼곤 하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죠.
그날도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싸이렌이 울리자마자 실제상황이라는 방송이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온 동네에 퍼지고 있는데, 어릴 때 종종 했던 민방위의 날 생각도 나고 그래선지 실제 상황이고 뭐고, 일하고 있는데 귀찮게 뭐하는거야 정도로 생각을 했죠.
어쨌든 사이렌 소리에 북한이 쳐들어왔어? 진짜? 이런 생각은 하지만 몸은 굼뜨게 움직이면서 일단은 회사를 나와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회사에서 집까지 가는 시간이 차로만 1시간을 타고 가야하는 거리라 대체 어떻게 집에 가야하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는데 당연히 도로는 이미 아비규환이었어요. 여기저기서 접촉사고가 나 있고, 사방 모든 도로가 자동차로 꽉 차서 빠져나갈 길이 없더군요. 60키로 정도 되는길을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더라구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저는 가장이고, 집에는 아내와 아기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사람들은 이제 자동차 지붕을 도로삼아 차들을 뛰어넘고, 걸어서 넘고 자기 갈길을 찾아가기 시작했죠. 그 와중에 여자들을 밀치고 지나가는 배나온 중년부터, 여자와 아이 먼저라고 소리치는 젊은 청년 등 잠깐사이에 행동으로 인격을 보여주는 행태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여자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버스 지붕에서 그 바로 앞의 택시 지붕으로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금방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해졌죠. 그게 아마 제가 길로 나선 뒤에 한 15분이나 지났을까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집에 가는게 급했기 때문에 누굴 도와주거나 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할 생각도 않고 그저 묵묵히 가야할 길을 갔죠.
여전히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는 귓가를 떠날 생각도 안하고 있고, 방송도 계속 되고 있었구요, 자동차에서 틀어놓은 라디오소리까지 같은 말을 떠들어대고 있으니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방송이 한데 어우러진 그 소음이란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보니 (누군가는 아프다고 떠들고 있고, 누군가는 도와주자고 하고 있고, 비키라는 둥 성질을 부리는 소리들...등등...) 어느 순간 주위의 일들에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더군요. 그제서야 방송의 내용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시체들이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지 마시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이런 방송을 듣고 **소리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요?
어이가 없었죠. 믿지도 않았구요... 이런 방송을 듣고 사람들이 이 소동을 피우는 건가 싶어서 기가막힐 따름이었습니다. 요즘엔 영화로도 잘 만들지 않는 소재잖아요. 좀비따위... 하지만, 그 방송을 하던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도 그렇고, 눈앞에 펼쳐진 생 난리통을 보고 있으려니 못믿겠다고 코웃음만 치고 있을 수는 없더군요.
진짜든 거짓말이든 이 상황에 가족과 떨어져있는건 아니라는 생각이었죠. 이젠 저도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가게 되더군요. 그 상황에 갑자기 저 뒤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발포명령을 내린 놈은 정말 쪼다에요. 그 좀비라는 것들 지금은 머리만 날려버리면 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지만, 그 땐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온 거리에 사람들이 패닉상태로 몰려있는 상황에서 발포를 하면, 압사하는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좀비들보다 훨씬 많을거란 생각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강남구청역 사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순식간에 달리기 시작했죠. 발에 사람이 밟히던 말던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날 좀비한테 당한 사람들보다 발에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면서요. 그 때 죽은 사람들이 그대로 좀비가 되는 바람에 강남은 지금도 위험지대잖아요.
어쨌든 그 바람에 인파에 떠밀려서 가려던 길로 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필사적으로 힘을 써서 군중들에서 떨어진 곳이 영동고등학교 옆 골목이었어요. 골목에도 버려진 차들이 일렬종대로 쭉 서 있는데 그거 장관이더군요. 동네가 동네다보니 벤츠, 벤틀리, 렉서스, BMW... 고급차들이 시동도 걸린채 운전석까지 열어놓고 방치 돼있는 거죠. 순간이지만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골목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봤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어요. 저 멀리서 비명소린지 함성소린지가 들리고, 조금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긴 해도, 실제 사람은 보이지 않더군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그것도 참 답답하더라구요. 그러다 누군가의 신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상관 말자고 생각했었어요. 일단 올림픽 대로쪽으로 올라가면 뭔가 수가 생길 것 같았거든요. 시야도 트여있을거고, 설마 그쪽으로 인파가 몰렸을까 싶기도 했구요. 그래서 그 소리를 무시하고 올림픽 대로만 생각하며 길을 가려고 했죠. 근데 그 신음소리라는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거에요. 60키로나 떨어진 곳에 있는 내 가족들이 비슷한 처지가 아니라는 장담도 못할 것 같았구요. 그러다보니 그냥 가면, 우리 가족도 남들이 그냥 버려두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도와 달라는 뜻에서 나도 약간의 도움은 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비소설 세계대전z의 일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