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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가라데 창시자 최배달
2013.05.13 18:44 조회 :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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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방어가 인간의 본능이듯이 공격성도 그럴 것이다. 실제로 공격과 방어는 또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든 행동이든 어떤 폭력의 일부일 것이다.

 

‘무도(武道)’나 ‘무예(武藝)’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해 수준 높은 공격과 방어를 전개하는 행위는 단순한 완력과 기술을 넘어 도예(道藝)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최영의(崔永宜, 1923∼1994)는 그런 무도를 세계를 보여주고 보급한 대표적 인물이다.

 

 

출생과 도일


최영의는 19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최승현과 김부영의 6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해 운영할 정도로 그의 집안은 유복하고 사회적 의식이 높았다.

 

최영의는 어려서부터 무도에 관심을 가졌다. 1932년 아버지가 세운 김제의 용지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택견·씨름 같은 고유 무술을 알게 되었다. 5년 뒤인 1937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거기서도 계속 무술을 연마했다.

 

그의 일생에서 큰 전기는 1939년이었다. 그 해 3월, 16세의 소년 최영의는 홀로 군산에서 나가사키로 도일했다. 그 뒤 그의 삶의 주된 무대를 선택한 중대한 결단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통신 때문에 무척 멀고 외로웠을 여정을 어린 나이에 홀로 떠났다는 사실은 그의 견고한 마음을 보여준다. 최영의는 야마나시(山梨) 소년항공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앞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할 가라테(空手道)를 처음으로 배웠다.

 

 

수련과 도약


최영의는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 학도병으로 차출되기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곧 일본이 패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무도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8월 도쿄에 공수도연구소를 열었고, 이듬해 4월에는 와세다(早稻田)대학 체육과에 입학했다.

 

그의 무도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3세 때인 1946년이었다. 그 해 9월 최영의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의 [오륜서(五輪書)]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쌍검을 사용하는 니토류(二刀流)를 창시해 60여 번의 결투에서 모두 승리한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설적 무사였고, [오륜서]는 그가 무도의 비법을 기록한 책이다.

 

1950년 맨손으로 소와 대결하던 때의 모습. 두 번에 걸친 입산 수도의 결과 맹우 47마리를 쓰러뜨리고, 그 중에 4마리를 즉사시키는 가공할 능력을 선보였다.<이미지 제공: 대산사업회>

1950년 맨손으로 소와 대결하던 때의 모습. 두 번에 걸친 입산 수도의 결과 맹우 47마리를 쓰러뜨리고, 그 중에 4마리를 즉사시키는 가공할 능력을 선보였다.
<이미지 제공: 대산사업회>


젊은 무도인의 감동은 결단과 정진으로 이어졌고, 지금 우리가 아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한 달 뒤 그는 미노분 산(身延山)에 들어가 무도 연마에 정진했다. 첫 번째 입산 수도였다. 자신의 무도를 ‘극진가라테(極眞空手)’로 명명한 것도 이 때였다. 그는, 무사시가 그랬듯이,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도를 중시했고, 그런 생각을 ‘극진(極眞)’이라는 단어에 담았다고 생각된다.

 

1년 여에 걸친 혹독한 수련의 결과는 놀라웠다. 최영의는 1947년 9월 종전 뒤 처음 열린 전 일본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고, 곧바로 다시 두 번째 입산 수도를 시작했다. 1948년 4월부터 치바 현 키요즈미 산에서 20개월 동안 훈련한 성과는 더욱 컸다. 최영의의 무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맨손으로 소를 쓰러뜨리고 그 뿔을 부러뜨렸다는 사실일 것인데, 그런 가공할 능력을 이때부터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11월 최영의는 치바의 다테산(館山)에서 맨손으로 소와 대결해 47마리를 쓰러뜨렸고, 그 중 4마리는 즉사했다. 27세의 청년은 범접하기 어려운 무도의 고수로 성장해 있었다.

 

 

대결과 승리, 그리고 세계화


1951년 3월 도쿄에서 유도·검도의 고수와 대결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세계를 돌며 사바트(프랑스 무술)·복싱·타이복싱·레슬링·카포에이라(발리 무술)·쿵푸 등 수많은 무도의 고수들과 100번이 넘는 대결을 펼쳤다. 톰 라이스(미국 레슬러, 1954년)·보몬(프랑스 사바트 고수)·무이슈킨(무체급 레슬러)·블랙 코브라(태국 무에타이 웰터급 챔피언. 이상 1957년) 등이 그 대표적 상대로 손꼽힌다. 1954년 현풍관 도장에서 유도 고단자 100명과 대결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것은 모두 격투에 가까운 실전이었고, 한번도 패배하지 않는 신화를 남겼다.

 

맨손으로 소의 뿔을 부러뜨리는 놀라운 힘과 기술도 여러 차례 선보였다.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도를 지향한 극진가라테의 창시자답게 그는 가장 위대한 실전의 고수로 평가된다. ‘신의 손(God's Hand)’이라는 칭호는 그런 평가를 집약하고 있다.

 

그 뒤 최영의는 극진가라테를 세계에 보급시켰다. 그의 일본 이름은 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인데, 1955년 5월 도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오야마 도장을 개설함으로써 본격적인 교육과 전파에 나섰다.


세계화의 출발은 미국이었다. 1953년 3월 최영의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시카고를 비롯한 30여 개의 도시에서 극진가라테를 선보였다. 1958년에는 FBI와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지도해 큰 명성을 얻었다.

 

선수권 대회도 확대되었다. 1959년부터는 하와이·북미·이스라엘·호주·남미·동남아시아·파키스탄·헝가리 등에서 지역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다. 1969년 9월에는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 가라테 선수권 대회를 시작했다. 그 대회는 다른 종목의 선수도 참가해 실전에 가까운 직접 타격을 펼치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은 격투기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로 평가된다.

 

6년 뒤에는 세계 대회로 확대되었다. 1975년 11월에 개최된 제1회 세계 대회에는 36개국 120여 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세계 대회의 참가자와 관중은 계속 늘어났고, 최강의 선수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다. 1994년 최영의가 타계한 뒤 제2대 관장으로 지명된 문장규(일본 이름 마쓰이 쇼케이. 당시 32세)는 1987년 제3회 세계 대회의 우승자였다.

 

지부도 많아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북미·유럽·중동·남미·동남아시아 등에 지부를 열고 1964년 6월 도쿄에 극진회관 총본부를 설립한 뒤 지금은 세계 20여 개국 80여 개 지부로 성장했다. 현재 극진가라테는 세계 120개 국에서 1400만 명이 수련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여러 도장이 개설되어 있다. 최영의는 요르단 왕실과 브라질 정부에서 각각 훈장(1979)과 문화 공로상(1984)을 받기도 했다.

 

다른 도구를 전혀 쓰지 않고 오직 몸과 정신의 힘으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 극진가라테를 개발하고 세계에 보급한 무도인은 1994년 4월 26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였다.

 

 

기록과 평가

수많은 고수와 실전으로 대결했지만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전설적 무도인의 삶은 자연히 많은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최영의 스스로 [나의 가라테 인생(私の空手道人生)](講談社, 1973)을 비롯한 여러 저서를 집필했고, [What is KARATE](1958)라는 영문 서적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상 최강의 가라테>(1976)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금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잘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두 개의 만화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고우영의 [대야망]과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다. 한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두 만화가의 장편은 큰 반향을 일으킨 수작이었다. [바람의 파이터]는 얼마 전 영화화되기도 했다(양윤호 연출, 2004).

 

고우영의 [대야망]은 1975년 [새소년]에 연재되고 소년 클로버문고로 출간된 작품이다. 그때 그 만화는 특히 남자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필자도 어렸을 때 [대야망]을 읽으면서 흥분에 가까운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한 10년 전부터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얼마 전 [대야망]이 복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2010). 급히 구해서 들춰본 그 책에는 어떤 평자의 말대로 “고우영 초기의 굵은 선과 역동적인 질감”이 넘쳤다. 그 책은 어린 시절의 흥분과 감동을 고스란히 다시 전해주었다.


무도인 최영의. 극진 가라테를 창시하고 세계화시킨 장본인으로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하다. <이미지 제공: 대산사업회>

무도인 최영의. 극진 가라테를 창시하고 세계화시킨 장본인으로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하다. <이미지 제공: 대산사업회>

 

최영의는 “모든 무도는 공존하면서 발전하는 것이지 적대관계의 무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이 없다”,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입은 좁게, 마음은 넓게 하며, 효(孝)를 원점으로 삼아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단순한 격투기가 아닌 진정한 무도를 지향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일본 유도 영웅 기무라 마사히코는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고 평가했는데,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최상의 헌사일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국적에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최영의는 자신을 “조선에 뿌리를 둔 국제인”으로 생각했다고 그의 둘째 아들 최광수 씨는 증언했다. 타계할 때 당시 32세의 젊은 재일 한국인 문장규를 후계자로 선택한 사실이나 늘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밝혔다는 일화 등을 볼 때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배달(倍達)’이라는 그의 이름이 그런 생각과 의지의 가장 뚜렷한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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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
  • 으엌ㅋㅋㅋㅋㅋ 극진가라뎈ㅋㅋㅋㅋㅋㅋ Lv. 1diecamp 2013.05.13
  • 사람들이 배달오는이유가 이거군아 Lv. 1나는둥퉁이 2013.05.13